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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녀의 이야기 / 그 소년의 이야기]

 쿠로켄 전력 60분 -주제-조금 신경쓰이다

연재알림은 트위터 @0haeyung0

 

평상시 집에서라면 입지도 않았을 니트와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밖에 나갈 때나 이런 걸 입었지 평소 집에서는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을 입는다. 그것도 반팔에 반바지. 정상적인 트레이닝복은 아니고, 바지는 중학교 때 입었던 지금 입기에는 조금 작은 반바지고, 위에는 목이 다 늘어난 검은 티였다. 바지가 얼마나 짧았으면 엄마는 항상길에 걸어가는 여대생이 너보다 바지가 길겠다!’ 하며 등짝을 때렸다. 오늘을 위해 처음 옷 가게에 들러 산 니트였다. 아이보리 색의 부드러운 니트는 길이가 좀 짧은듯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거울이 없는 방을 뒤로한 채 화장실까지 와서 옷차림을 체크했다. 괜찮은가? 어김없이 뻗친 머리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머리를 감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방금 전에 양치를 했지만 입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다시 한번 칫솔을 들었다. 양치를 하며 약간 푸르스름한 턱을 쓸었다. 분명 아침에 면도를 했건만 다시 수염이 자라나고 있었다. 입을 헹군 후 세이빙 폼을 턱에 잔뜩 묻히고 별로 자라나지도 않은 수염을 밀었다. 스킨을 바르고 거울 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섰다. 이건... 너무...

 

기대하는 것 같잖아

 

잘 차려입은 옷과 평소와는 달리 멀끔한 모습에서 오늘을 기대한 티가 너무 많이 났다. 켄마의 얼굴을 떠올리자 한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잠깐 떠올린 건데 이렇게 얼굴이 빨개지다니.. 다시 차가운 손으로 얼굴을 만지자 좀 진정이 되는듯싶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같은 반 야쿠였다.

 

-오늘 생일이지? 안 놀아?

 

. 오늘은 따로 누구 보기로 했어.

 

-? 그럼 우리들은? 어제 그렇게 학교에서 본 걸로 끝?

 

그렇긴 한데.. 좀 그렇지?”

 

-당연하지. 오늘이 안되면 내일 만나자. 애들한테도 그렇게 말해둘게.

 

그래.”

 

전화를 끊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부엌 식탁에는 아침에 사다 둔 애플파이와 냉장고에는 어제 오면서 종류별로 사둔 음료수가 들어있었다. 하릴없이 냉장고를 열어 발이 달리지도 않은 주스가 잘 있나 확인하고, 애플파이를 들어보고, 접시까지 확인했다. 신발장을 정리하고, 혹시라도 쓸지도 모르니 화장실을 청소했다. 방안에 먼지라도 있을까 불안해 방을 청소하고, 혹시라도 퀴퀴한 냄새가 날까 싶어 문을 열어 환기시켰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이불에 페브x즈를 뿌리고, 각을 잡아 베개를 세웠다. 휴지로 가득 찬 쓰레기통을 비우고 언제 먹은 지 기억도 안 나는 컵라면 통을 버렸다. 이렇게 청소까지 했는데 켄마가 올 시간까지는 한 시간이나 남았다. 침대에 가만히 앉아 책상 위에 있는 자명종 시계의 작은 초침 소리를 들었다. 째깍 한번 내는 것이 그렇게 힘들까?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갔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집 앞으로 나갔다. 켄마가 어떻게 걸어올까? 켄마의 걸음걸음을 예상하며 켄마의 집으로 향했다. 조금 쌀쌀한 날씨지만 아무것도 걸치고 나오지 않은 게 후회되지는 않았다. 두근거리며 미친 듯이 뛰는 심장 때문에 온몸이 뜨거워 더워 미칠 것 같았다.

 

얼마 멀지 않은 켄마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큰 나무 하나가 있었는데 옛날에는 그 나무에 올라 켄마와 놀고는 했었다. 작은 키 때문에 불꽃놀이가 안 보여 우울해진 켄마를 들어 올려 쿠로는 튼튼하게 뻗어있는 가지 위에 올려주곤 했다. 언제부터였는지 항상 나는 켄마와 함께 걷지 않고 한 발짝 먼저 걸었다. 같이 걷게 되면 켄마의 얼굴만 쳐다봐 종종 전봇대나 나무에 부딪히곤 했다. 그거로만 끝나면 상관없었지만, 바보같이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와 바보같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통제할 수가 없었다. 이런 바보 같은 모습을 켄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항상 한 발짝 앞서서 걸었다. 켄마의 집으로 향하는 길목 길목마다 추억이 서려있다. 저 골목에서는 켄마가 나를 따라 뛰다가 넘어져 오른쪽 무릎이 깨졌었는데 그날 처음 본 켄마의 눈물에 당황해 아무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하고 울고 있는 켄마를 업고 걸었다. 업힌 켄마에게서는 아기 냄새가 났다.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어렸던 켄마를 달래주고, 켄마를 업고 이 골목을 내려오던 그날. 그날부터 켄마를 좋아했던 걸지도 모른다. 아직도 켄마의 무릎에는 희미한 흉터가 남아있다. 흉터를 볼 때마다 나 때문에 진 흉같아 미안한 마음에 괜스레 한 번씩 만졌다. 사실, 흉터를 만지면 어쩔 줄 몰라 하는 네 모습이 너무 예뻐서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흉터에 닿은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기적이지만 그 예쁜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바지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박스에는 작은 머리핀이 들어있었다. 얼마 전에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가게에 들러 발견한 건데, 켄마의 머리에 꽂아주면 어울릴 것 같아 처음으로 여자에게 줄 선물을 샀다. 그냥 핀을 손에 쥐고 들고나가려는 쿠로를 직원이 불러 세웠다.

 

여자친구한테 줄 거죠?”

 

“…. , 여자친구 선물이에요.”

 

거짓말을 하려니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여자친구는 맞았다. 여자인 친구. 그러니 틀린 말은 아니다.

 

센스 없게.. 그럼 포장해야죠! 이리 줘봐요. 포장해줄게요.”

 

감사합니다.”

 

파스텔톤의 파란색 박스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핀이 들어있었다. 집으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갔다.방에서 창문을 내다보며 켄마가 오는 걸 기다렸다. 손으로는 박스의 포장을 만지작거리며. 그토록 기다리던 켄마의 모습이 보이고 벨 소리가 들리자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 문 앞에 섰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문이 열었다. 어제도 봤지만 언제나 보고 싶은 얼굴이 문 앞에 서있었다. 여전히 예쁜 얼굴에 평소와 다르게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아줌마, 아저씨는?”

 

, 회사에서 부부동반으로 골프 치러. 내일 오실 거야.”

 

그렇구나. 오늘 어디 안 나가?”

 

안 나가. 어제 애들하고 학교에서 끝냈어.”

 

.. 켄마는 목에 걸린 목도리와 코트를 벗고 쿠로에게 건넸다. 자연스럽게 쿠로는 켄마의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어놨다. 자신의 코트 옆에 나란히 걸린 켄마의 코트를 보니 뭔가 이상했다. 항상 옆에 걸었었는데 오늘은 뭔가 특별하고 달라 보였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쿠로는 고개를 돌리고 주머니에 들어있는 박스를 만지작거렸다. 언제 전해 줘야 할까? 어정쩡하게 서있는 지금 분위기가 어색하니, 지금 주는 게 좋을까?

 

저기.. 쿠로.”

 

아니, 역시 지금은 아니다.

 

, 음료수 내올게! 애플파이도 있어!! 앉아있어.”

 

켄마의 말을 외면한 채 밑으로 내려갔다. 계단에 기대 주머니에 들어있던 박스를 꺼냈다. 머리핀을 켄마가 좋아할까? 좋아하지는 않아도 선물이니까 켄마 성격상 받기는 할 거다. 학교나 놀 때 하고 다니지는 않겠지만.. 갑자기 우울해졌다.

 

쟁반에 켄마가 좋아하는 음료수와 애플파이를 담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옆에 낮게 깔려있는 상에 쟁반을 올려놨다. 어느새 켄마는 깔려있던 러그 위에 앉아있었다. 매끈한 다리가 시선에 들어와 얼굴이 붉어졌다. 빠르게 시선을 돌리며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켄마는 등 뒤에서 쇼핑백을 꺼냈다. 정중하게 친구가 아닌 남한테 선물을 주듯 켄마는 고개를 숙이고 쇼핑백을 건넸다. 쇼핑백 안에는 카드와 붉은색 목도리가 들어있었다. 촉감이 켄마의 손처럼 부드러웠다. 자세히 보니 목도리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았다. 분명 본인이 직접 만들었을 거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뜨개질을 했을 켄마를 상상하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카드에는 작은 글씨로 생일 축하해라는 짧은 글이 쓰여있었다. 글씨 주변에는 눌린 자국이 있었다. ‘생일 축하해라는 글자가 여러 장의 카드를 겹쳐서 썼는지 위에 카드에 눌려 여러 군데 적혀있었다. 크기도, 모양도 다 달랐다. 몇 번을 쓰고 버렸을 모습을 생각하니 지금이라도 둘 사이를 가로막은 상을 치우고 켄마를 껴안고 싶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박스에서 핀을 꺼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켄마의 머리에 꽂아줬다. 손을 더듬어 머리에 꽂힌 게 뭔지 확인하는 켄마를 뒤로 한채 쿠로는 핸드폰을 들어 카메라로 켄마를 찍었다. 찰칵하는 소리가 나자 켄마는 본능적으로 어색하지만 예쁜 미소를 지었다.

 

예쁘다.”

 

?”

 

, 아니, , 그게 아니라.....이거.”

 

입에서 튀어나온 본심에 당황해 쿠로는 핸드폰을 켄마쪽으로 보여줬다. 사진을 본 켄마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핀을 만져봤다. 생각했던 대로 켄마와 잘 어울렸다. 쇼핑백에서 붉은 목도리를 꺼내 목에 칭칭 감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그거, 지나가면서 예쁘길래, 아니, 그게 아니라 그래! 엄마가! 엄마가 예쁘다고 너 주라고 해서... 그래서 꽂아준 거야. 내 방에는 거울 없으니까.”

 

나중에. 정말 너를 좋아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날이 오면. 그때는 당당하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엄마라는 핑계를 안 써도 부담 없이 너에게 뭔가를 줄 수 있는 때가 오면. 처음에는 그저 조금. 조금, 신경 쓰였다. 평소와 같이 바람에 살랑이는 머리가 그날따라 신경 쓰였고, 치마 아래 드러난 다리가 신경 쓰였다. 옛날에는 눈높이가 같았는데 어느새 고개를 숙여 내려다봐야 하는 얼굴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그저 조금 신경 쓰여서 힐끔 쳐다봤던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평상시 같으면 켄마가 공을 들고 뛰어다니며, 감독과 대화하는 모습은 관심도 없었을 거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그냥 아무한테나 전해 받아 목을 축이던 물인데... 이상하게 경기가 끝나면 저 멀리 있는 너를 향해 걸어가 네가 건네주는 물을 받고, 네가 덮어주는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내가 널 좋아하게 된 건 그저 사소한 관심이었다. 작은 새싹처럼 조금 신경 쓰이던 네가 어느새 내 마음속에 큰 나무가 되어 나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켄마가 직접 짠 목도리를 만지작거렸다. 목도리 한 땀 한 땀에 켄마의 정성이 묻어있었다. 무릎 위에서 움직이던 켄마의 손이 올라가자 쿠로는 목도리를 보고 있던 눈을 돌려 켄마를 쳐다봤다. 아니, 켄마의 핸드폰을 쳐다봤다.

 

찰칵

 

쿠로가 거울 보고 싶을까 봐... 잘 어울려.”

 

켄마는 멋쩍은 듯 웃으며 액정을 들어 보였다. 액정 속 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색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웃는 네 모습만이 눈에 들어왔다. 내 방에 앉아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네가.

 

. 예쁘네.”

 

정말 예쁘네.

 

쿠로는 조용히 핸드폰을 들어 바탕화면을 켄마의 사진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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