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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녀의 이야기 / 그 소년의 이야기]

 쿠로켄 전력 60분 -주제-조금 신경쓰이다

연재알림은 트위터 @0haeyung0


 

교복이 아니면 입지도 않았던 치마를 하굣길에 가게에 들러 샀다. 빨간 체크 치마. 귀엽게 퍼지는 디자인이 예쁜 건지, 길이가 허벅지 중간 정도까지 오는 길이가 적당한 건지, 나랑 어울리는지.. 잘 모른다. 사복 치마는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다. 적당히 붙는 흰색 목 폴라 니트와 같이 입고 거울 앞에 섰다. 긴 검은 머리에 치마가 어색해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소녀가 앞에 서있었다. 신발은 뭘 신어야 할까? 옷을 사면서 신발은 사지 못했다. 조금 검은 얼룩이 묻긴 했지만 깨끗한 흰 캔버스를 찾았다. 흰 발목 양말을 신고 캔버스를 신었다. 현관에 있는 거울 속 켄마는 지나치게 창백했다.

 

잘 차려입은 귀신같아

 

얼굴에 생기 따위는 없었다. 입술을 깨무니 피가 도는지 입술이 잠깐 빨개졌다가 다시 창백한 색으로 돌아갔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언니는 자기가 더 초조한지 방안에 들어가 틴트를 들고 나왔다. 언니가 남자친구한테 선물 받았다는 틴트는 꽤 비싼 브랜드의 화장품이라고 들었다. 언니도 엄청 아껴가며 남자친구를 만나러 갈 때만 바르는 틴트였다. 언니는 붉은색 틴트를 들고 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입술에 발라줬다.

 

바르니까 훨씬 예쁘네. 오늘이지? 쿠로 생일?”

 

..”

 

거울 앞에 서서 붉은색으로 물든 입술을 만져봤다. 자신의 입술이 아닌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물든 입술은 소녀의 생기와 더해져 싱그러웠다. 창백한 시체 같던 얼굴에 조금은 생기가 도는 듯했다. 언니는 아직도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이 틴트 브러시를 빼내 손가락에 살짝 묻히고는 볼을 톡톡 두드렸다. 복숭아처럼 뺨이 붉게 물들자 켄마는 민망하다는 듯이 손을 들어 볼을 문질렀다. 하지만 이미 피부에 스며든 틴트는 지워지지 않고 붉은 복숭아처럼 켄마의 얼굴에 붙어있었다.

 

잘 갔다 와.”

 

언니에게 고개를 끄덕여보고 집을 나섰다. 얼마 멀지 않은 쿠로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큰 나무 하나가 있었는데 옛날에는 그 나무에 올라 쿠로와 놀고는 했었다. 작은 키 때문에 불꽃놀이가 안 보여 우울해진 켄마를 들어 올려 쿠로는 튼튼하게 뻗어있는 가지 위에 올려주곤 했다. 항상 쿠로와 걸을 때는 쿠로가 앞에 서고 켄마는 쿠로의 등을 보고 따라갔다. 그 길이 어디든지 쿠로가 가는 길은 항상 따라갔고, 함께였다. 쿠로 집으로 향하는 길목 길목마다 추억이 서려있다. 저 골목에서는 뛰어가는 쿠로를 따라 뛰다가 넘어져 오른쪽 무릎이 깨졌었는데 그날 쿠로는 켄마를 업고 울고 있는 켄마를 달래주었다. 켄마가 업힌 등에서는 따뜻하고 포근한 냄새가 났었다.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어렸던 켄마를 달래주고, 이 골목을 쿠로에게 업혀서 내려오던 그날. 그날부터 쿠로를 좋아했던 걸지도 모른다. 아직도 무릎에는 희미한 흉터가 남아있다. 흉터를 볼 때마다 쿠로는 미안하다는 듯이 흉터를 만졌다. 그 따뜻한 손길에 항상 가슴이 두근거렸다. 흉터를 만져보고는 미안하다는 듯이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괜찮다고, 이제는 안 아프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 미소를 보고 있으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기적이지만 그 웃는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손에 들린 쇼핑백에는 쿠로의 목도리가 들어있었다. 두 달 전부터 짜기 시작한 건데 목도리를 빨리 짜기는 했지만 대부분 마음에 안 들어서 실을 풀고, 다시 코를 만들고, 풀고, 다시 짜고를 몇 수십 번을 반복했다. 목도리와 씨름하느라 두 달 동안은 게임도 못했다. 밤늦게까지 목도리를 짜고, 다시 풀고, 만족스럽게 나올 때까지 실을 풀었다. 풀려가는 실이 아깝기는 했지만 쿠로한테는 좋은 걸 해주고 싶었다. 붉은색이 잘 어울려 붉은 털실로 목도리를 만들었다. 두 달의 정성이 들어간 긴 목도리가 쇼핑백에 담겨있었다. 편지를 쓸까 고민했지만 항상 보는 사이에 편지라니. . 부끄럽고 민망해 작은 카드를 짧게 써서 같이 담았다. 혹시라도 틀릴까 봐 같은 카드를 5장을 샀다. 뭐라 써야 할까 고민하다가 작은 글씨로생일 축하해라는 짧은 글을 쓰고,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몇 장을 다시 쓰니 카드 5장을 다 써서 다시 사러 갔었다. 그렇게 완성된 카드와 목도리가 들어있는 쇼핑백에는 리본이 붙어있었다. 노란색의 리본은 쇼핑백이 너무 허전해 보여 아침에 급하게 묶은 건데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쿠로의 집 앞에 서서 핸드폰을 들어 얼굴을 확인하고 벨을 눌렀다. 2층에서 내려오는지 계단을 빠르게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어제도 봤지만 언제나 보고 싶은 얼굴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튀어나온 얼굴에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줌마, 아저씨는?”

 

, 회사에서 부부동반으로 골프 치러. 내일 오실 거야.”

 

그렇구나. 오늘 어디 안 나가?”

 

안 나가. 어제 애들하고 학교에서 끝냈어.”

 

.. 켄마는 목에 걸린 목도리와 코트를 벗고 쿠로에게 건넸다. 자연스럽게 쿠로는 켄마의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어놨다. 쿠로의 코트 옆에 나란히 걸린 켄마의 코트를 보니 뭔가 이상했다. 항상 있었던 일인데 오늘은 뭔가 특별하고 달라 보였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켄마는 고개를 숙이고 쇼핑백을 쥔 손을 바라봤다. 언제 전해 줘야 할까? 어정쩡하게 서있는 지금 분위기가 어색하니, 지금 주는 게 좋을까?

 

저기.. 쿠로.”

 

, 음료수 내올게! 애플파이도 있어!! 앉아있어.”

 

켄마의 말을 듣지 못한 채 쿠로는 밑으로 내려갔다. 쇼핑백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끈이 얽힌 손을 꼼지락거렸다. 침대에 앉아 방을 둘러보니 크고 작은 박스와 쇼핑백들이 놓여있었다. 어제 받은 선물인가? 쇼핑백을 침대 위에 놓고 조심히 일어나 박스를 열어봤다. 시계와, 초콜릿, 팔찌, 목걸이.. 다 비싸 보이는 선물들이었다. 선물들 옆에는 하나같이 다 편지가 들어있었다. 다 여자 글씨였다. 제대로 된 편지도 없고, 선물도 자신이 만든 목도리 포장도 박스가 아니라 쇼핑백이었다. 노란 리본이 매달려있는 흰색 쇼핑백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목도리를 쿠로가 좋아할까? 좋아하지는 않아도 선물이니까 받기는 할 거다. 하고 다니지는 않겠지만.. 우울해졌다.

 

쿠로가 쟁반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침대 옆에 낮게 깔려있는 상에 쟁반을 올려놨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포크와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어색함에 뒤로 치워뒀던 쇼핑백을 꺼내자 쇼핑백으로 쏠리는 쿠로의 시선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른들이 선물을 주고받듯 무릎 꿇은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쿠로에게 건네는 본새가 이상했지만 선물을 받고 어떤 표정을 지을 쿠로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떨군 채 음료수를 마셨다. 아무런 말이 없자 초조함에 빨대 끝을 씹었다. 플라스틱의 질긴 느낌이 입안을 맴돌았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켄마는 머리카락에 닿는 쿠로의 손길에 놀라 몸을 웅크렀다. 머리카락에 이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손을 더듬어 뭔가에 눌린 것 같은 머리를 만지니 차가운 뭔가가 만져졌다. 쿠로는 핸드폰을 들어 카메라로 켄마를 찍었다. 찰칵하는 소리가 나자 켄마는 본능적으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예쁘다.”

 

?”

 

, 아니, , 그게 아니라.....이거.”

 

쿠로는 핸드폰을 켄마쪽으로 보여줬다. 머리 부분이 확대된 사진에는 리본 모양의 작은 핀이 꽂혀있었다. 붉은색의 큐빅이 가운데 박혀있는 은색 리본 핀은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켄마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핀을 만져봤다. 리본 모양의 매끈한 금속이 손가락에 느껴졌다. 쿠로는 쇼핑백에서 붉은 목도리를 꺼내 목에 칭칭 감았다.

 

그거, 지나가면서 예쁘길래, 아니, 그게 아니라 그래! 엄마가! 엄마가 예쁘다고 너 주라고 해서... 그래서 꽂아준 거야. 내 방에는 거울 없으니까.”

 

.. 그렇구나.. 괜히 쿠로가 사줬다고 설렜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입술을 깨물고 눈을 아래로 깔았다. 바보 같다. 이런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처음에는 그저 조금. 조금, 신경 쓰였다. 평소와 같이 올라간 쿠로의 머리가 그날따라 신경 쓰였고, 먼저 걸어가는 쿠로의 넓은 어깨가 신경쓰였다. 옛날에는 눈높이가 같았는데 어느새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야 하는 얼굴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그저 조금 신경 쓰여서 힐끔 쳐다봤던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평상시 같으면 쿠로가 배구하면서 흐르는 땀 같은 건 관심도 없었을거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가까운 사람부터 주던 물인데... 이상하게 경기 내내 코트 위를 뛰어다니는 너를 쫓아 경기가 끝나면 저 멀리서 걸어들어오는 너를 향해 뛰어 가 물을 줬다. 수건을 땀이 나는 머리에 덮어주고, 네가 마른 목을 축인 걸 확인한 다음 다른 선수들에게 물을 줬다. 내가 널 좋아하게 된 건 그저 사소한 관심이었다. 작은 새싹처럼 조금 신경 쓰이던 네가 어느새 내 마음속에 큰 나무가 되어 나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목도리를 보며 신기해하고 있는 쿠로를 향해 핸드폰을 들었다. 켄마의 손이 올라가자 쿠로는 목도리를 보고 있던 눈을 돌려 켄마를 쳐다봤다. 아니, 켄마의 핸드폰을 쳐다봤다.

 

찰칵

 

쿠로가 거울 보고 싶을까 봐... 잘 어울려.”

 

사진 속 쿠로는 입은 일자로 다물어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쿠로 몰래 저장 버튼을 누르고 화면을 쿠로 쪽으로 돌려 보여줬다.

 

. 예쁘네.”

 

그러게. 멋있다. 두달동안 열심히 만들길 잘한거같아.

 

켄마는 조용히 핸드폰을 들어 바탕화면을 쿠로의 사진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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