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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쿠로]

[켄쿠로]교생선생(1)

해융 2016. 4. 3. 17:30

 

"여기는 도쿄대 체육교육과에 재학 중인 쿠로오 테츠로라고 한다. 우리 네코마 고교를 졸업한 너네 선배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고, 교생 선생님이자 선배님이니까 말 잘 듣도록. 테츠로 선생님. 간단하게 자기소개랑 앞으로 조회 부탁드립니다. , 1교시 수업도 지도 부탁드립니다.”

 

이 말을 끝으로 담임선생님이 나가고 반을 한번 훑어봤다. 파릇파릇한 아이들을 보니 나도 다시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거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한번 숨을 들이쉬고 일주일 전부터 준비한 자기소개를 하기 위해 입을 뗐다.

. 처음 뵙겠습니다. 쿠로오 테츠로라고 합니다. 교생실습을 모교로 나오게 되어 좋은데요. 남학생들은 저를 쿠로오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되고 우리 여학생들은 테츠로씨~♥라고 부르셔도 무관합니다."

 

나의 능글거리는 자기소개에 여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남학생들도 키가 크고 잘생긴 도쿄대 출신인 자신들의 교생선생을 선망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닿아 있을 때의 기분은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짜릿하다. 교생실습은 떨리기도 했지만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설렘이 더 컸다.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맡게 된 반아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하는데 단 한 명만이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창밖에 뭐가 있는 건지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 남학생은 꽤나 곱상하게 생겼다. 탈색을 한 건지 밝은 금발의 머리와 꽤 많이 자라난 검은색 뿌리 부분의 머리가 턱까지 내려오는 긴 단발이었다. 정갈하게 타진 5;5가르마가 꽤 깔끔했다. 탈색 머리 때문에 불량학생인가 싶었지만 입고 있는 교복은 머리와 맞지 않게 단정했다. 자리표를 보고 이름을 확인했다. 아이들끼리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면 저 학생의 이름은 아마

 

코즈메 켄마.

 

코즈메였다. 조회시간이 끝나고 체육복으로 갈아입으라고 학생들에게 말을 한 뒤 문을 닫고 나왔다. 교생실습생방에 가서 트레이닝복을 챙겨 남교사 화장실로 가서 정장에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신발도 구두에서 편한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정장을 잘 개서 교생실습방에 있는 캐비닛에 넣고 열쇠를 돌려 잠근 후, 1교시 수업이 이루어질 제2체육관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손에는 체육관 창고 열쇠와 아이들의 사진과 이름이 적혀있는 명렬표가 들려있었다.

 

원래 교생실습을 나왔으면 2주간은 참관수업을 했었는데 나를 맡은 선생님의 실습비도 내고 오는 건데 수업은 처음부터 하라는 배려로 첫 주부터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떨리는 마음을 잡고 체육관 문을 열었는데 떠들고 있던 학생들이 한순간 조용해지며 나에게 주목하자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진도를 보니 오늘은 실제 배구 경기를 하는 시간이었다. 배구....꿈이 없었던 나에게 체육관련 진로를 정하게 도와줬던 운동이었다. 고교시절 배구부 활동을 하며 체육에 흥미를 느꼈고 진로까지 체육 선생으로 정하게 되었다.

 

여기 아직도 배구부 있나?”

 

! 배구부 정말 대단해요! 이번에 전국 대회까지 나간데요!!”

 

맨 앞에 앉은 활기찬 여학생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졌다. 전국 대회까지 나간다니 꽤나 실력이 괜찮은듯했다.

 

헤에. 대단하네.. 우리 반에도 배구부 있어? 배구부는 손들어봐.”

 

한순간 활기차던 학생들이 다 조용해지고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배구부가 없나 싶어서 실망하고 있는 사이에 반 애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코즈메에게 말이다 

 

, 켄마는 배구부 레귤러예요.” 

 

레귤러? 리베로인가? 전국 대회까지 나가는 배구부의 레귤러라고 하기에는 켄마는 굉장히 작았다. 리베로라면 가능했지만.. 다른 포지션은 불가능해 보였다.

 

"포지션은?"

 

세터요! 경기 보러 갔었는데 정말 대단해요.”

 

꽤 실력이 좋은 거 같았다.

 

그럼 체육관을 반으로 나눠서 여학생들끼리 포지션별로 나눠서 2팀으로 나눠서 경기하고, 남학생들은 2팀으로 나눠서 한 팀은 코즈메가 들어가고, 한 팀은 선생님이 들어가서 경기하도록 해도 괜찮겠지?”

 

.”

 

경기할 의사가 없거나 아픈 학생들을 빼니 남녀 두 팀씩이 만들어졌다. 체육관이 넓은 탓에 반절로 나눠도 정식 코트 규격에 위배되지는 않았다. 팀을 구분해주는 색의 조끼를 입고 고등학교 때 내 포지션이었던 미들 블로커 자리에 섰다. 애들이니 뭐 얼마나 하겠나 싶어 살살 게임을 하려고 했지만 날라오는 서브를 보고 마음을 바꿨다. 코즈메 켄마. 꽤 괜찮은 서브를 할 줄 아는 아이였다. 순식간에 한점을 따내자 경기를 지켜보던 아이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고등학생이라 봐준다는 말은 이제 취소다.

 

다시 한번 서브를 하는 켄마의 공을 대학생의 연륜으로 가뿐하게 받아냈다. 받아냈으나 세터 포지션을 맡은 학생이 공을 잘못 올리는 바람에 저쪽 팀의 찬스볼이 되어버렸고 블로킹을 하기 위해 네트 쪽을 향해 뛰었다. 스파이크를 치기 위해 뛰어오른 스파이커는 두 명이였다.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너무 눈에 튀는 동작이었다. 누가 봐도 오른쪽이었다.

 

오른쪽 스파이커를 막기 위해 오른쪽으로 뛰는 순간 코즈메는 간단하게 다른 손으로 공을 쳐 네트 옆으로 공을 넘겼다.

 

투어택이였다.

 

예측하기 어려운 움직임이었다. 그런 대단한 일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뒤로 돌아가는 코즈메의 뒷모습이 내 승부욕에 불을 지폈다.

 

.

 

결과는 2521. 누가 이겼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다. 아이들의 죄송하다는 말에 괜찮다고, 선수도 아닌데 이 정도 한 거면 잘한 거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다.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다.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체육관을 빠져나갔지만 상실감은 여전했다. 체육관 바닥에 벌러덩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아무리 수업이라고 해도 패배의 상실감은 꽤 컸다.

 

무엇보다도 이겼을 때조차 기뻐하는 기색이 없던 코즈메가 기분 나빴다.

 

.

 

 

수업이 끝나고 교생일지를 쓴 후, 교생선생님들과 회식을 한 뒤 헤어져 알딸딸하게 취한 채 가까운 상점으로 들어갔다. 하나둘씩 물건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가게를 나왔다. CCTV가 없는 곳을 골라 갔으니 경찰에 신고당할 일은 없었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가게에서 훔친 귀걸이를 꺼내 보았다. 귀도 뚫지 않은 나에게는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주머니에 있는 귀걸이 3개를 바닥에 버렸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술만 마시면 도벽이 생겼다. 멀쩡할 때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지만 술만 마시면 무슨 용기가 그렇게 생기는 건지 상점에 들어가 작은 거 몇 개를 훔쳤다. 훔치는 물건들은 다 나한테는 쓸모없는 귀걸이 립스틱 같은 물건들이었다. 술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정신이 아예 안 들 정도로 취하지도 않았다. 그냥 술 취했을 때의 몽롱한 기분과 물건을 훔칠 때의 스릴감이 기분 좋았다. 귀걸이를 땅에 버리고 학교 주변에 있는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

 

선생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의외의 인물이 서있었다. 코즈메였다. 조용하던 아이가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자 당황스러웠지만 이제 나에게도 마음의 문을 여는 건가 싶어 솔직히 기뻤다.

 

그래, 코즈메. 무슨 일이니?”

 

진로 관련해서 상담할게 있어서요. 방과 후에 상담실에서 상담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보다는 담임선생님하고 상담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남을 상담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거 같은데...”

 

사실 교생선생이라고 해도 코즈메와 5살밖에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았다. 나 또한 코즈메와 같은 학생이었다. 아무리 대학생이라고 해도 담임선생님보다 더 잘 상담을 할 자신이 없었다.

 

담임선생님하고는 의견이 안 맞아서요.”

 

단호하게 말하는 코즈메에 한순간 위축되었지만 표정을 풀고 상담 신청을 받아들였다. 방과 후에 상담실로 오라고 말한 뒤 다시 수업에 들어갔다.

 

 

.

 

상담실에서 코즈메를 기다린지 10분 만에 코즈메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며 들어왔다. 상담실에 들어오며 문을 잠그긴 했지만 그 나이 또래의 학생들이 비밀을 얘기할 때 흔히 취하는 태도인지라 개의치 않았다.

 

그럼 무슨 내용인지 한번 말해 볼래?”

 

코즈메가 소파에 앉자 노트를 펼치며 펜을 집어 들었다. 노트에 고민을 적어가며 상담을 하기 위해 챙겨온 거였다. 코즈메는 교복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노트 위에 올려놨다. 귀걸이 3쌍이었다.

 

왜 이런 걸 꺼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코즈메의 취향인가 싶어 넘어갔다. 하지만 다음으로 보여주는 동영상은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내가 어제 귀걸이를 훔치고 있는 모습이 동영상에는 찍혀있었다. 다시 노트 위에 있는 귀걸이를 쳐다보니 내가 어제 훔친 귀걸이와 같은 거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어떻게..”

 

바로 앞에 있는 게임센터에서 게임을 사고 나오는데 선생님이 훔치고 계시더라고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학교에 알려지면 교생실습은 물론 대학생활도 끝이었다. 작은 귀걸이라지만 도둑질은 도둑질이었다. 불안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지만 뚜렷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 이걸 학교 신고할까요?”

 

제발 신고만은 하지 말아 줘. 돈이 필요하니? 내가 뭐든지 줄 테니까. 제발 동영상.. 지워줘. 부탁할게.”

 

비굴했지만 코즈메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 애원이 통했는지 코즈메는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신고 안 했으면 좋겠죠.”

 

간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고만 안 한다면 코즈메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었다.

 

그럼 벗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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